달의 바다

  •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또렷하게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걸요.

 

  • 아- 상상할 수 있으세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지구를? 지구는 파란색과 하얀색이 뒤섞인 아름다운 구슬 같았어요. 아니면 한입에 쏙 들어오는 알사탕. 정말이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었죠. 저는 소리업이 눈을 깜빡이며, 저 알사탕 안에 있을 점보다 작은 제 생의 흔적들을 찾아보았어요. 글쎄, 그건 졸렬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더군요. 알사탕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간사, 말이에요.

 

  • 저는 다시 그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지구가 알사탕만하게 보이는 곳으로, 그러니까 제 잘못이나 슬픔도 알사탕의 티끌로 보이는 곳으로요. 엄마, 저는 그 모든 순간을 즐겼고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이걸 위해서 희생했던 것들, 제가 저지른 실수와 오류들 말이에요. 사는 게 선택의 문제라면 저는 제 손에 있는 것만 바라보고 싶거든요.

 

  •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그저 바라볼 뿐이죠. 하지만 이 세계가 오해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면 분명히 신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분을 향해서 큰 소리로 노래라도 불러드리고 싶어요. 지구를 벗어나면 우주, 또 우주를 벗어나면 무엇이 있을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거든요.

 

  • 엄마, 제가 있는 곳을 회색빛의 우울한 모래더미 어디쯤으로 떠올리진 말아주세요. 생각하면 엄마의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으로, 아, 그래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바닷가에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밤하늘의 저 먼 데를 쳐다보면 아름답고 둥근 행성 한구석에서 엄마의 딸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에요. 그때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언제나 엄마가  말씀해주셨잖아요?                                                                                                         

           <정한아著, 달의 바다, 문학동네>


우연히 친구의 노트에서 발견한 중학교 3학년 때 내 장래 희망은 '천문학자'였다. 이 네 글자를 보자 NASA에서 일하면서 우주선을 타보고 싶어했다는 것도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이건 어디에도 적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숨겨둔 꿈. 중학교 때 까지는 과학을 꽤 좋아하고, 썩 잘하기까지 했으니 저런 큰 꿈을 품었나보다.

  하지만 그보다도 난 달과 우주 그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다. 태어나서 열다섯살까지 살았던 주택집 옥상에서 여름 밤마다 누워 별자리를 손가락으로 그려보곤 했다. 케이스에 그려진 경마장면으로 추측컨대, 스포츠관람용이었던 것임이 분명한 망원경을 눈에 대고 옆에 펼쳐 놓은 별자리책을 흘끔거리고 있으면 이상하게 편안하고 또 기분이 좋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오빠 보라고 정기구독한 '뉴턴'과학잡지에서도 별이 폭발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나, 우주선이 보내 온 오묘한 별 사진을 좋아했다. 달에 다양한 이름이 붙은 바다와 산맥이 있다는 것을 '아폴로13'라는 영화를 보면서 알았고, '콘택트'는 내가 2번 이상 감상한 첫 영화였을 것이다.

고등학교의 자연계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실은 과학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때문에 대학에서는 과학이나 우주 따위와는 상관없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천문학자의 꿈은 잊고 살았어도 밤하늘과 별은 늘 올려다보고 바라보고 싶은 것이었다. 힘들 때 별을 보고 있으면 살고 싶어졌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별이 사실은 몇 억광년 전의 '과거'에 빛나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주는 너무 광활하고 인간의 삶은 미약했다. 그래서 현실의 괴로움 정도는 찰나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나는 위안을 얻어왔다. 그리고 이 소설의 순이 고모가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역시 비슷한 감정을 불러와 위로가 되었다. 잘못은 티끌만큼 작아지고 반짝이는 긍정으로 시작할 수 있는 그 곳, 우주.



by joee | 2007/10/01 01:57 | 책+영화+등등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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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10/0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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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피쯔 at 2007/10/02 14:13
와 저랑 참 비슷하네요. 조경철박사가 쓴 책을 읽고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거든요. 지금 보고 있는 별빛이 사실은 몇천, 몇만년전 그 별이 뿜어냈던 것이라 생각하면 이 세상이 갑자기 이질적으로 느껴졌었어요. 물론 본격적으로 지구과학을 배우면서 내가 좋아했던 것은 그저 이상적인 별나라였다는 것을 깨달았지만..후후...그래도 밤하늘과 우주는 아직 저에게도 가장 광활하고도 평화로운, 이상적인 세계랍니다.
Commented by joee at 2007/10/03 00:20
피쯔/ 앗. 저도 조경철박사가 쓴 책 가지고 있었어요. 그 할아버지 한 때 많이 나왔는데 요즘은 뭐하실까요? 히히. 우주선 타보는 건 여전히 뜬구름 같은 희망으로 품고 있지만, 로또가 돼도 불가능한 것이니..휴우. 주말에 짬내서 콘택트라도 봐야겠어요.
Commented by Kurosaki at 2007/10/03 23:26
우연히 이오보다가 여기루 왔네요. 저도 고등학교 다닐때만 해도 천문학자가 꿈이 였더랬죠. 대학교 진학도 천문이나 우주 관련된 걸루 가고싶었지만, 전혀 다른 곳으로 ^^; 오고 말았지만요. 가끔씩 밤에 집에 들어오다가 하늘을 보면 별이 희미하게 나마 빛나고 있으면 웬지 기분이 좋더라구요.
예전에는 망원경들구 관측도 다니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못하네요. 예전에 관측다니고 하던때가 그립네요 ^^;
Commented by joee at 2007/10/04 00:47
Kurosaki/ 천문학자가 꿈인 어린이 및 청소년이 선생님, 의사가 꿈인 아이들만큼 많았던 걸까요? 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인가?! 크크
망원경들고 관측도 다니셨다니 멋진걸요. 저는 딱 한 번 천체망원경으로 달이랑 금성, 토성 본 적 있어요. 감동이었어요 정말.
Commented by 이명현 at 2008/12/22 17:34
2009년이 세계 천문의 해예요. 여러 행사를 준비 중이구요.
2009년 1월 15일 개막식과 함께 홈페이지+웹진 개통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http://www.astronomy2009.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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