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

이놈의 입이 방정. 이 말을 한 열번쯤 되뇌며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놈의 입이 방정 맞지만 않았디면, 나는 어디를 꼭 가야만 하는 것이 휴가가 아니라며 서울에서 좀 게으른 휴가를 보냈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략 두 달 전부터 철도여행을 할 거라고 큰소리를 떵떵 친데다가, 8월 휴가 날짜가 가까워 올 수록 어디를 갈지 지도를 펴 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으며, 어디어디를 가고 싶다는 이야기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실제 서울에서 보낼 휴가 플랜B도 있었다. 하루에 하나씩 전시회를 가고 신사동에 있는 샌드위치가 맛있다는 빵집에서 호기롭게 점심을 먹는 등의 한량짓을 하는 것이었다. 하루정도는 은행에 들러 통장도 만들면서 무절제한 소비생활을 청산하려는 계획까지. 이 정도면 플랜B치고도 너무 훌륭한 것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지만, 말했다시피 입이 방정이었고 기차티켓은 이미 환불할 수 없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첫휴가'이니까 잘 보내야 한다는 강박같은 것이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 평일 5일동안 쉰다는 건 휴가 외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일테고 그래서 나는 훌쩍 멀리 떠나고 싶다는 소망과 함께 평일 대낮의 한량짓이 너무나 그리웠다. 이렇게 양 손에 떡을 들고 갈팡질팡 하면서도 나는 3일부터 9일까지 사용할 수 있는 기차티켓을 구입하면서 편한 운동화도 한 켤레 샀다. 은근히 즐기며 여행준비를 착착 했으면서도 입이 방정이었다고 한탄하게 된 것은 뜨겁고 뜨거운 한여름, 휴가 첫 날에 맞춰 생리가 시작돼 버렸기 때문이다.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고 몸은 물을 머금은 스폰지처럼 마냥 무거운 그 때는 집에서 뒹굴거려도 시원치 않을 판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입이 방정이었던 덕분에 일정을 이틀정도 미루긴 했지만 8월 4일 밤 10시에 용산역으로 향했다. 지도를 보며 서울에서 가장 먼 곳은 어디지 하며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전라선의 끝 여수였다. 정 힘들면 여수에서 향일암만 보고 서울로 돌아와도 5만 4천 7백원하는 티켓값은 본전치기를 하게 되니 손해보는 것은 아니라는 플랜C를 급조하여 무궁화호에 올라탔다. 빈좌석 하나 없이 사람을 가득 태운 무궁화호 열차는 8월 5일 새벽 4시 19분 여수역 도착을 위해 덜컹덜컹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 덜컹거림에 연방 머리를 창에 박으며 잠이 들었다.


by joee | 2008/09/06 00:24 | 그리고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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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피쯔 at 2008/09/06 10:14
후후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도 추석다음주 정도엔 일이 잡히지 않으면 잠시 어디라도 다녀올 예정인데,,,사실 맘속으로는 나름의 플랜B도 세워놓았다는...ㅎㅎ
그럼 여수 여행기 계속 기다리고 있을께요 ^^
Commented by joee at 2008/09/08 23:47
추석 다음 주 정도면 이 늦더위도 어느정도 사그라들고 여행하기 딱 좋을 것 같아요.
누군가 어디로 떠날 거라는 말만 들어도 부러워서 배가 다 아픕니다. 흐흐;

여수 여행기는 별 거 없어요. 여수에서는 반나절 정도만 있다가 바로 이동했거든요.
아무튼 기다리지 마세욧! ;ㅁ;
Commented at 2008/09/07 01:0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joee at 2008/09/09 00:13
정독도서관에 검색해보니 소장도서에 있네요. 당장 빌리러 가야겠어요.
문학 속 배경이 된 장소를 주제로 여행해도 재밌을 것 같아요.
실제로 어디갈까 고민하던 중에, 안도현 시가 생각나서 모항에 갈까, 아님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는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말을 따라 삼천포에 갈까
뭐 그랬었거든요.

예쁜 컨버스 한 켤레 사서 떠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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